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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는 공직과정

교양기타/기타 | 2013.07.25 00:00 | Posted by 깨비형

1. 민생안정을 위한 을파소의 진대법(賑貸法)

○ 고구려 시대에 오늘날의 사회정책에 해당하는 진대법이 처음 실시 ⇒ 고려의 '의창'

○ 을파소는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개혁정치의 주역이 됨

○ 진대법의 목표 : 민생의 안정을 통한 국가 안정, 왕권강화


2. 유교적 이상국가 수립을 위한 최승로의 시무28조

○ 고려 성종대에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체제가 수립

○ 성종대 정치개혁의 대부분은 최승로의 시무28조에 기초한 것

○ 왕의 이상적인 정치는 위민 애민 사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

○ 시무28조의 주요 내용

▷ 국경수비를 튼튼히 하고 왕의 호위군을 축소하여 비용을 절약할 것

▷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것

▷ 사치스런 불교 행사 줄이고 사찰 창건 막아, 민생 폐해를 막을 것

▷ 관리의 복식, 주택 규모 등을 규제하고, 신분제를 엄격히 하는 등 사회 제도를 확립할 것

▷ 중국문화의 무분별한 수용보다는 토속적인 문화습속을 지킬 것

○ 시무28조의 중요한 의미 : 불교폐단, 민생문제, 신분 복식제도 등에서 중국에 대한 독자성 과시


3. 유교적 관료정치의 구현을 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정도전과 이성계의 협력이 결실을 이룬 것이 조선 건국

○ 정도전이 지향했던 정치는 유교적 명분과 실용을 함께 추구하는 것

○ 조선경국전은 조선왕조 500년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의 기본 틀을 제공


4. 점진적 개혁을 통한 이이(李珥)의 갱장론(更張論)

○ 이이는 조선 중기를 경장의 시대로 보았음

○ 조선 전기 정치세력의 추이에서 이이는 조광조의 이상정치를 본받았음

○ 경장의 시대에는 필요한 법을 고쳐야 한다는 변혁이론은 현대의 혁신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면이 있음

○ 이이의 <만언봉사>의 기본 정신은 왕의 수신(修身)과 폐습(弊習)의 개혁

▷ 다스림의 방법 제시

- 왕은 신하의 말을 성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언로를 항상 개방 건의

- 사치풍조를 개혁하고, 절약과 검소한 사회 풍조 조성 건의

- 공납의 제도를 고쳐서 함부로 걷어들이는 폐단 제거 건의

- 군정을 개혁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이 불공평한 것을 제거하고, 튼튼한 국방 유지 건의

- 시폐(時弊)를 개혁하는 기구로 경제사(經濟司) 설치 건의

○ 이이의 개혁론

▷ 현실을 직시한 점진적 개혁

▷ 공안(貢案)의 개정

▷ 군적(軍籍)의 개정

▷ 국방력의 강화

육조계(六條啓)

▷ 임현능(任賢能) : 어질고 능력있는 인재를 등용할 것 ▷ 책임행정

▷ 양군민(養軍民) : 백성과 군사를 함께 기를 것 ▷ 민생안정

▷ 족재용(足財用) : 국가 재정을 풍족히 할 것 ▷ 국가재정 확충

▷ 고번병(固藩屛) : 변방을 튼튼히 할 것 ▷ 국방강화

▷ 비전마(備戰馬) : 전쟁을 대비해 말을 준비할 것 ▷ 군사력 강화

▷ 명교화(明敎化) : 백성을 교화할 것 ▷ 교육

○ 이이의 이기설은 조선 후기 실학으로 연결


5. 고려말 새로운 시대변화에 역행하는 기득권의 저항과 혁신적 전제 개혁추진 - 조준

○ 고려말 사전이 확대되고 권세가들의 농장 운영이 일반화되면서 국가 운영의 기반이 되는 토지제도가 문란해짐

○ 왕실과 조정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민변정사업을 추진하였으나 이는 사업 자체의 한계 때문에 결실을 얻기 어려움

○ 전제개혁 문제는 고려말 개혁의 핵심 의제였고, 새 왕조 개창과도 직결되는 것이었으므로,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자 곧바로 전제개혁에 착수

○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온건파는 급진파의 전제 개혁에 치열하게 반대

○ 이러한 상황에서 전제 개혁을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이 조준. 조준은 위화도 회군 이후 전제 개혁의 선봉에 서서 세 차례 대표적인 상소문을 통하여 전제개혁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역설

○ 이러한 전제개혁은 고려말 계속 누적되어 온 토지문제를 기득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으로 전면 개혁하려는 시도였으며, 이를 통해 새왕조 개창의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할 수 있음


6. 조선 전기 국가체제의 안정과 백성의 교화를 위한 훈민정음의 창제 - 세종

○ 훈민정음은 중국에서 들어온 음운학이나 거란, 몽골 등의 문자와 같은 이론적 영향 아래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글자가 있어야 하겠다는 필요에 의해 창제됨

○ 훈민정음은 세종 25년 12월에 처음 만들어진 이후, 여러 논의를 거쳐 세종 28년 9월에 정식으로 반포

○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직접 주도하였으며, 당시 동궁이던 문종이나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왕실 세력을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 반면,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양반 사대부의 참여는 높지 않았음

○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해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의 학사들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나 성리학 정통에서 벗어난다고 비판함. 이는 백성에 대한 관념이나 성리학 정통에 대한 의식에서 세종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 세력과 달랐기 때문

○ 훈민정음 창제 이후 훈민정음의 사용은 불경의 언해를 중심으로 진행. 이는 사상적으로 불교에 의지하던 당시 왕실의 경향을 반영한 것. 성종 이후 보다 다양한 분야로 훈민정음의 사용 예가 확대됨


7. 성리학적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정치 혁신의 좌절 - 조광조

○ 중종반정 이후 반정공신이 주도하는 정국이 삼대장의 죽음과 공신세력의 약화로 변화될 무렵, 중종은 친정을 표방하며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정국의 변화를 도모

○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사림 세력은 중종대 성리학적 원리에 입각한 개혁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조광조로, 그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당시 사림세력의 영수로 추앙받음

○ 조광조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성리학적 정치질서의 확립 작업으로서 조광조와 김굉필의 문묘종사나 소격서의 혁파를 추진하였고, 개혁을 추동하는 세력을 확립하기 위하여 현량과의 시행,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 등을 추진함.

○ 하지만 사림세력의 비타협적 개혁 작업에 불만을 갖게 된 중종은 훈구대신들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세력을 제거함. 대부분의 사림세력은 파직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고, 조광조는 결국 죽게됨

○ 중종대 조광조의 개혁 추진과 좌절, 그리고 죽음은 개인적으로는 실패인 것처럼 보이나, 당시의 시대적 소명을 정확히 진단하고 역사를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끈 그의 노력은 이후 조선시대 정치의 방향을 결정한 중대한 업적이 되었음


8. 국난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군사행정의 혁신과 유비무환 - 이순신

○ 군사행정의 혁신

▷ 군사 기강의 확립

▷ 훈련 사기를 높임

▷ 무기 정비

▷ 전쟁물자 비축

○ 조선 수군의 승리요인

▷ 군사체제

▷ 병선의 기술적 우위

▷ 주변 지형을 이용한 전략, 전술의 적절한 운용

▷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가능

○ 평소에 혁신적인 군사 행정의 수행을 통하여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고 적절한 전략, 전술을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가능


9. 김춘추의 냉철한 현실 인식과 지혜로운 외교

○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나제동맹)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함, →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 일부를 수복함, → 이를 신라가 뺏음 → 백제와 신라 전쟁(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 전사 → 백제의 총공세 시작

○ 김춘추의 대 고구려 원군 요청의 포석은?

1) 대내 : 김유신의 군사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 계기 → 비담의 난 진압 → 권력 장악의 계기

2) 대외 : 당나라에 고구려와 연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집 → 대당 외교 전개

○ 김춘추의 대당 외교 성과 : 삼국통일전쟁에서 우위 확보 → 자주성 논란 야기

○ 김춘추가 협상을 벌였던 곳 : 고구려, 당, 왜(일본)


10. 소신에 찬 서희의 담판과 영토확장

○ 서희가 전쟁을 치르지 않고 요나라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

▷ 국제정세에 대한 냉정한 이해 능력

▷ 상대(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한 정확한 의도를 파악

▷ 당당한 대응과 확고한 소신

○ 10세기 중, 후반에 중국 대륙과 만주, 한반도에는 송, 거란(요), 고려가 각 지역의 강력한 통일 왕조로 등장하여 동북아시아를 주도하는 국제질서 형성

○ 통일 국가를 이룬 고려, 송, 거란(요)은 상호 견제와 대립 속에서 발전. 특히 거란이 만리장성 이북지역을 점령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자, 고려의 북진정책과 충돌

○ 거란은 사신을 보내 고려와 친교를 맺으려 했으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야만의 나라로 여겨 수교를 거절함 → 거란의 고려 침입으로 이어짐

○ 고려에 침입한 거란은 항복을 요구함 → 고려는 강화론과 주전론으로 갈려 갑론을박했으나 강화론이 우세함 → 서경(평양) 이북 땅을 거란에 넘겨주고 화평을 맺자는 의견이 강력하게 대두 → 서희의 반대

○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만나 담판함 → 여진이 장악하고 있던 압록강 일대를 고려의 영토로 편입해 달라고 요청 →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설치

○ 서희 외교의 의의 : 명분으로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대외에 과시 → 현실적으로 강동 6주를 얻음으로써 고려의 북진정책이 성공한 사례가 됨 → 나아가 고려가 기본적으로 국가체제가 잘 갖춰져 있고 군사력이 튼실하다는 점을 증명


11. 중도외교의 귀재 광해군

○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분조 활동 등을 통해 전쟁을 이끔

○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군은 파주 전투 패배 이후 일본과 강화 추진 → 구원병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함 → 광해군의 명나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 계기

○ 광해군은 누루하치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 → 광해군 외교의 기초 형성

○ 명의 원군 요청 때 광해군의 대응은 “패하지 않은 싸움” 주문 → 광해군이 정보수집에 힘을 쏟은 결과 명나라가 여진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 따름

○ 광해군은 명의 재 원군 요청을 단호히 거부 → 여진을 견제하려고 명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역공을 취함

○ 군비개발과 정보 수집 등의 군사력 강화와 이를 통한 정세분석으로 실리적 외교를 펼침 → 광해군 외교의 요체는 명분을 배제한 철저한 현실(실리) 외교


12. 명분보다 중요한 국가 존립의 현실 : 최명길의 ‘주화론’과 국난 극복

○ 후금의 조선 침략(정묘호란)으로 오랑캐로만 여기던 여진(후금)과 ‘형제의 맹’을 맺음

○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은 후금의 재침에 대한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여전히 후금을 ‘오랑채’로 치부할 뿐이었음

○ 청나라의 재침(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순식간에 무너짐 → 조선 조정(인조)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감 → 청나라 남한산성 포위

○ 척화파와 주화파가 심하게 대립하였으나, 현실은 화친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음

○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가 성립

○ 최명길은 대표적 주화론자로서 강화의 모든 과정을 주도함 → 조정 안팎의 비난 대상 → 강화의 불가피성은 모두 인정함

○ 최명길은 나라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강화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현실을 택한다.


13.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 정승 황희

○ 황희가 정승이 되기까지의 과정

▷ 고려가 멸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조선의 출사를 거부
▷ ‘혼란에 빠진 백성과 조정을 위해 옳은 정사를 펼치라’는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출사함
▷ 세종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하다 태종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함

▷ 세종이 황희를 관직에 복직시키고 영의정으로 제수하여 정사를 모도하게 함

○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흉년으로 기근에 고통 받고 있는 백성들의 구제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백성들이 황희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소공대(召公臺)’를 쌓음

○ 목민관 황희는 농사개량을 통하여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뽕나무를 많이 심어 지역경제의 안정을 꾀하였으며, 중앙 요직에 있을 때는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음

○ 사람을 보는 안목이 정확하여 국가의 기둥으로 부하직원을 인재로 키우는 능력이 탁월

○ 능력있는 노비를 속량하여 과거에 합격하게 할 정도로 평소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황희는 천첩(賤妾)소생의 천역(賤役)부담을 면제하는 등 애민정신이 투철


14. 행정 개선을 통한 민생의 안정 - 지방관의 표상 제주목사 이약동

○ 조선 성종 1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부정과 민폐를 근절시키는 등 선정을 펼침

▷ 제주도 한라산 꼭대기에서 치르는 제사의 폐단을 즉각 조정에 보고하여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의 위치로 옮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줌

▷ 지방세를 현실에 맞게 감하게 하고, 호사스런 수령들의 사냥을 금지시켜 지도자의 솔선수범과 리더십을 보여줌

▷ 제주도 야생말을 조련하여 국용에 쓰게 하고, 수령들을 문무로 교차 파견하여 제주도민의 학문과 무술 연마의 기회를 보장

○ 이약동과 관련된 제주도 설화 - 연려실기술

▷ 괘편암 : 이약동이 두고온 채찍이 얹혀져 있는 바위

▷ 투갑연 : 그의 선정에 백성들이 고마워서 정표로 전해준 갑옷조차 사리사욕이라 생각해 바다에 던짐

○ 중종 때 성종대의 청백리에 뽑히고 영예로운 국가 원로들의 명단인 기영록에 올랐으며, ‘원리원칙을 지켜 공무를 집행하고, 온유한 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는 뜻의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음


15. 가난한 선비와 같은 정승 오리 이원익

○ 조선 중기의 당쟁 속에서 당론에 치우치지않는 공정한 자세로 독자적인 정치영역을 확보

○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걸쳐 다섯 차례나 영의정에 제수됨

○ 영중추부사로 있을 때 염근리에 피선었으나 이를 부끄럽게 여겨 사양

○ 광해군 대에 영의정으로서 경기지역에 대동법의 시행 추진을 건의

○ 당시 시대 상황이 당쟁이 극심했던 때로서 성리학적 정치도리인 「공도의 확립」에 집중되었고, 병란을 치른 후 민생이 극히 피폐한 상태였으므로 「휼민사상」을 몰소 실천한 사람이었음

○ 인조 반정 후 다시 재상으로 권력이 회복되었음에도 그의 사는 집은 여전히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함


16. 신기술 도입을 통한 재정절약과 청렴한 공직자상을 제시한 목민심서의 저자 - 정약용

○ 곡산부사 시절 해결한 문제들

▷ 베를 재는 자를 규격대로 통일

▷ 쌀을 보는 앞에서 되게 하여 규정을 지킴

▷ 싼 데서 관전으로 포를 사고 백성에게 싸게 산만큼만 받음

▷ 여름에 귀한 얼음을 겨울에 보관하여 팔아, 중국 사신 접대 경비를 절약함

○ 수원성 축성에 거중기를 제작하여 국가재정을 절약하였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주장

○ 국가 통치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경세유표』를 집필. 이를 통해 정치․사회․경제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목표를 두었고, 인사 행정 개혁이 필요함을 정리

○ 지방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목민심서』를 저술하여, 민(民)의 편에 서서 관의 횡포오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경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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